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주니 한결 수월합니다

이달순, 이현수 제주 큰수풀공동체 생산자

 

 

바닥부터 자욱이 깔린 안개가 비행기 날개 끝을 가만히 지워간다.
7시 55분발 비행기가 벌써 세 시간 반째 김포공항에 머물러 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오직 하나의 생각만으로 견딘다.
“일단 뜨기만 하면 금방 따뜻한 남쪽 나라다.” 하지만 짙은 안개 속을 뚫고 도착한 제주의 추위는 그날따라 가볍게 입은 외투의 옷깃을 저미게 했고, 서쪽으로 20km를 더 달려 도착한 제주 한림읍 큰수풀공동체에서는 살을 찌르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콕콕 찔러댔다.
찬 바람 맞고 더 단단해져

“안 그래도 바람이 많은 제주인데 우리 공동체는 서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직격으로 맞아 더 쌀쌀해요. 그래도 바람을 맞아야 맛도 들어차고 자라기도 잘 자라니 감사하죠.”
서울보다 더 춥다고 엄살을 떨자 이달순 생산자가 어깨를 토닥이며 이야기한다.

육지보다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제주이기에 한살림의 겨울밥상을 책임질 수 있었겠지만, 그곳에서 자라는 채소들은 노지에서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버티며 옹골지고 단단해진다.

생각해보면 제주라는 곳이 원래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가진 곳 아니던가.
아름다운 여행지 곳곳에 현대사의 아픔이 녹아있는 4·3사건 이야기가 담겨있고, 제주바다의 상징이 된 해녀들은 저마다의 애환을 지닌 채 물질로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공동체 회원들의 밭마다 둘러친 돌담도 마찬가지다. 제주도는 겨울철 노지 농사도 멀칭 없이 가능하다. 비닐없는 진녹색 밭을 조각조각 가르는 검은 돌담은 보기엔 참 좋지만 그것이 제주의 옛 농부들이 일군 척박한 땅의 잔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

“젊을 때는 저도 밭을 일구며 나온 돌로 담을 쌓았었죠. 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지었지만 물려받은 땅이 거의 없었으니깐.” 아득할 정도로 오래 전부터 돌밭을 일구며 때로는 조와 보리를, 때로는 유채와 고구마를 내던 그는 20여 년 전 한살림을 만났다.

밭을 일구고, 작물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제대로 된 판로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 ‘사람이 먹는 것인데 농약을 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케일, 양배추 등을 키우던 그에게 한살림이 다가왔다.

“양배추, 쪽파를 달라고 하길래 이제야 제대로 된 판매처가 생기나 했는데 이게 웬걸. 한동안 일주일에 대여섯 상자밖에 나가지 않더라고요. 몇 상자 되지도 않는 것을 제주공항까지 가서 부쳐줬는데 운송비가 더 나왔을 거예요. 하하.” 공동체 식구가 늘어나고 출하량도 많이 늘어난 지금은 작물을 자동화물에 실어 배로 올려 보낸다.

보내는 품은 확실히 줄었지만 출하량이 늘어난 만큼 일의 양이 대폭 늘어났다. 이제는 슬슬 농사일이 벅찬 나이. 아들 이현수 생산자가 농사 일부를 물려받아 참 다행이다 싶다.

 

서로가 있어 기대며 농사 짓습니다

“어떤 생산자라도 자식에게 내가 짓는 농사 물려받으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못할 거예요. 본인 직장도 있고, 가정도 있는데 흔쾌히 와줘서 고맙죠.” 말투에서 아들에 대한 대견함이 뚝뚝 묻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오던 거니깐 농사가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죠. 그래도 재미있어요. 유기농법이 아니라 자기농법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가 너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하라고 해서 또래 생산자들과 많이 배우러 다니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행해보는 게 즐거워요. 배운 것으로 풀리지 않을 때 물어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현수 생산자가 독립해 짓는 농사 면적은 약 3,000평.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결과물은 참 알차다.

“아직 덜 익었지만 맛이라도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맛있는지.” 촬영을 마치고 뚝 잘라 건네준 양배추 속잎이 한결 푸르다. 아삭하고 시원한 맛이 이달순-이현수 생산자의 웃음과 닮았다.
이달순, 이현수 생산자는 제주 큰수풀공동체에서 브로컬리, 양배추,방울양배추 등 겨울채소를 생산하는 부자(父子) 생산자다.
아버지는 아들의 열정을, 아들은 아버지의 연륜을 배워가며 한살림의 겨울밥상을 책임지고 있다.

글·사진 김현준 편집부

 


 

아버지 세대, 아들 세대 함께 큰수풀 이루어요

 

 

제주 큰수풀공동체의 이름은 근처의 큰 숲 즉, 어도오름에서 따왔다. 수풀의 특징은 개개의 풀이 무리 지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러 해 씨앗을 뿌리며 자라다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과 손자가 뒤엉켜서 빼곡해지고, 단단히 얽힌 관계 속에서 품을 더 키워간다.

물론 어머니이자 여성생산자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큰수풀공동체는 이름처럼 수풀을 닮았다.
이달순-이현수 생산자를 비롯해 양순영-양성철, 임정언-임세호, 임상만-임재형, 고찬식-고경택 그리고 고 임선준-임동영 생산자까지. 큰수풀공동체 15가구 중 아버지를 따라 농사짓거나 배우기 시작한 후계농이 6명이나 된다.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 평생 일군 땅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다소 생경한 모습이다.
“돈이 되는 농사라 그런가요?” 다소 도발적인 질문에 공동체 총무를 맡고 있는 임동영 생산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살림 조합원님들이 많이들 이용해 주셔서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으니 분명 직업으로도 매력이 있죠. 그런데 무엇보다 아버지 세대가 농사짓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가 아닐까요? 농사를 짓다 보니 알겠어요.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일이 사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십자가 닮은 꽃을 지닌
제주의 겨울채소 오형제

 

 

제주 큰수풀공동체 식구들은 크게 과수와 겨울채소 두 종류의 농사를 짓는다. 겨울채소를 재배하는 생산
자는 정도는 다르지만 다섯 종류를 골고루 심는 편이다. 모두 같은 십자화과 작물이라 파종 및 정식 시기가 비슷하고, 키우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습성을 지녀 관리하기 편한 것은 사실이나 수확시기가 겹치니 이 즈음에는 정신없이 바쁘다.
한살림 출하 시기인 1월부터 5월까지는 다섯 채소가 심긴 밭을 매일 훑으며 다 자란 것들을 수확하느라 정신이 없다.

피해를 입히는 병충해가 비슷한 것도 어찌 보면 장점이지만 특정 병 또는 충이 창궐하는 시기에는 온 밭이 초토화될 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멀칭을 하는 대신 잡초 싹이 나올 즈음 화염으로 제초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검질매기(김매기의 제주 말)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올해 작황은 지난해와 비교해 부진한 편이다. 공동체가 있는 제주 서쪽은 안 그래도 비가 적게 오는 편인데 올해는 심할 정도로 가물었다.
밭을 둘러보던 양순영 생산자가 흙을 한줌 쥔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다운 비가 거의 안 왔어요. 비가 오면 작물들이 새파래지는데 스프링클러로는 아무리 물을 많이 줘도 비 한 번 오는 것보다 못하거든요. 그래도 맛은 잘 들었어요. 양이 적고 생장이 늦더라도 맛있게만 자라주면 감사하죠.”